나의 이야기

박태원..

酒有所 2017. 6. 24.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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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엄마와 자기를 내팽겨치고 혼자 멀리 떠나간다면 어린아이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요?


언니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가 버렸고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은 커가면서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자신이나 남아 있는 가족한테 엄청난 고통이었다는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워낙 센 직모라서 머리스타일을 저렇게 밖에 할수 없었다고 하는 박태원씨..


초기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김기림으로 구성된 구인회에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박팔양이 들어왔고 그 이후 김유정씨가 들어옵니다.



현실비판적인 문학을 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사람들 곱게 보일리 없었을겁니다.

남들 보다 나은 환경에서 공부했고 그 만큼 배웠으면 그 지식 민중들한테 전파하고 사회 개혁에 힘써서 조국 독립에 

이바지 해야 하는데 말랑말랑한 연애소설이나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시, 

외국유학에 고료 받아가면서 글 쓸 정도면 저런 생각 가지지 않은 사람 없었을겁니다.

무서웠겠지요!! 그 두려움에 한발짝 나서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을겁니다.



광복후, 사회주의계열 문학동맹에 잠시 가입했던적도 있었고, 전쟁통에 월북하게 됩니다.


초기에는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출신성분(남로당) 때문에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복귀후에도 그 후유증 때문인지

실명하게 됩니다.  망가질대로 망가진 몸에 전신불수가 되고 86년 7월에 사망하게 됩니다.



 소설가 김소운, 화가 이승만, 소설가 박태원, 소설가 정인택(왼쪽부터)



사망연도에 날짜까지 정확히 알수 있었던건 신문 부고란에 실렸는데,

북한신문 부고란에 이름이 적힐 정도면 노후에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겁니다.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 중 하나로 평가 받는 "갑오농민전쟁"을 박태원씨의 작품이라서일겁니다.


몸이 좋지 않아 3부 작성할때는 부인인 권영희씨가 박태원의 구술을 받아 적어서 살을 보태 작성했다 합니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정인택씨 부인이었는데 정인택씨 사망후 박태원씨와 재혼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약사에 숙부가 의사였으니 꽤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고모가 허영숙(이광수의 부인)을 통해 이광수의 만남을 주선하고, 

숙부 또한 당시 문단에 영향력이 있던 양건식에게 조카 박태원을 소개해 줍니다.



2006년 이산가족 상봉때 프레시안에 적은 차남 재영씨의 글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에 조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살아온 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였습니다. 


당시 문인들 중 갖은 노력끝에 해방됐는데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한 사람도 많았고, 

월북 인사들 중에도 언제 죽은지도 모르게 숙청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진의 오른쪽이 월북한 딸 설영씨, 중간이 둘째딸 소영씨..


잘 아시다시피 소영씨의 막내아들이 봉감독입니다.

봉준호감독 얘기 나올때 마다 박태원씨가 생각나더군요.


아무래도 우리가 많이 아는 사람이니깐 더 가깝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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