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prac&logNo=220439965514 1898년 경남 밀양 출생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중국 유학 중, 독일 조차지의 덕화 학당과 신흥 무관 학교를 거치며 군사학과 폭탄제조술 등을 배우던 김원봉은 1919년 3.1운동을 보며 기쁨과 동시에 한편으로 비폭력 투쟁에는 한계가 있음을 결심하며, 같은 해 11월 9일, 길림성에서 동지 12명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을 위한 독립비밀 결사대 의열단 을 조직한다. 김원봉을 단장으로 윤세주, 이성우, 이종암, 함봉인, 함봉근, 곽재기, 권준, 김상윤, 신철유, 배동선, 서상락, 강세우까지 이 13명은 이후 변절을 하거나 밀정을 한 사람이 1명도 없었다. 이후 단재 신채호가 작성해준 '조선 혁명 선언' 으로 이론적 기초를 다진다. * 주요 서거 박재혁 열사 - 부산 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저격한 뒤 체포되는데, 왜놈 손에 죽느니 내 손으로 죽겠다며 단식을 하여 27세에 옥에서 아사한다. 김원봉은 의열단 첫 성공에 기뻐하지만 이후 박재혁에게서 온 편지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형편이 뜻대로 되어가니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염려해준 덕분인듯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를 읽고 슬퍼했다고 한다. 김익상 열사 - 21년 9월, 조선 총독부 폭탄 투하 작전에 투입. 와세다 대학 교복을 입고 기차 옆자리의 젊은 일본 여자와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걸며 친해지면서 입국 검문 피했고, 경성에서는 전기 수리공으로 위장하여 폭탄을 던졌고, 이후 다시 목수로 변장하여 중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오성윤 열사 - 육군 대장 다나카 게이치가 상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제거 계획에 나서는데, 부두에서 다나카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순간, 하필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서 주으러 가던 미국 여성 스네이더가 대신 맞아 사망하고 만다. 옥에서 죽은 스네이더의 남편인 아놀드 스네이더가 면회를 오는데 이 때 일본의 부당한 지배와 조선의 입장, 총을 쏜 이유를 밝히며 깊은 사과를 하였고, 스네이더는 이해를 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 후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무장 단체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고, 임시 정부 또한 의열단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김상옥 열사 - 현실 각시탈. 사이토 총독 저격을 준비하던 중 은신처가 탄로 났는데, 쌍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 수십명의 포위를 벗어나 한 겨울의 남산을 넘어 승려로 변장하여 탈출한다. 이후 다시 은신처가 탄로 나 4대 경찰서 수백명의 무장 경관들과 일대다 총격전을 3시간반동안 벌이는데, 10여명을 살상한 후 마지막 남은 한 발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결. 이미 몸에는 총 10발을 맞은 후였다. 김원봉은 독립운동가 중 가장 높은 현상금이 걸린 인물이었으며, 백범 김구의 한인 애국단(윤봉길, 이봉창 등)보다 먼저 결성되어, 더 많은 의거를 이룬 집단이었다. 1923년 8월 30일. 일제 상하이 총영사 보고문. "김약산은 사무소를 상해 영창 190호에 두었으나 이곳은 야간에 극비로 또 드물게 왕래할 뿐이며, 평상시 거소가 일정하지 않아, 단원에게조차 현 주소를 말하지 않으며, 일본 관원으로부터 수배되는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체포를 면하기 위해 약 5개소를 전전하며 매일밤 잠자는 장소를 달리 했다" 이렇듯 김원봉은 신출귀몰하기로 명성이 높았으며, 약 20년의 활동 동안 단 한번도 체포 된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금 난항, 밀정의 난립, 일제의 색출 작업 심화로 의열단은 쇠퇴하였고, 26년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게릴라전을 넘어 군사 조직을 계획한다. 이곳에서 김원봉은 장제스, 주은래 등 중국 최고 지도자들과 교류를 하며, 32년 그들의 동의와 도움으로 '조선 혁명 간부 학교' 를 세우고, 38년에는 국민당 산하의 '조선 의용대' 를 결성한다. 이후 공산주의 이론가인 안광천과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을 맺고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설립한다. 그리고 수많은 당으로 흩어져있던(이청천의 신한독립당, 김규식의 대한독립당, 김구의 한인애국단 등등) 독립군을 하나로 모으자는 주장을 하며 이들 중 일부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지만, 김원봉과 라이벌 구도였던 김구의 거절과 민족주의 계열의 '빨갱이' 주장 때문에 반쪽짜리 통합이었다. 한편 의용대 대원들 사이에선 여기서 소극적인 일을 하느니 직접 전선에 가서 일본과 싸우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42년 일부 대원들이 중국 예난(연안)으로 이탈하여 조선 의용군 이란 이름으로 독립, 그곳에서 김두봉을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연합을 한다. 이에 김원봉의 힘은 줄고 국민당의 지원 역시 끊겨버렸고, 결국 김구의 광복군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 왜 우리는 김원봉을 몰랐나 역사는 승자의 기술서. 이승만과 김구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에서 김원봉은 그 업적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언급이 금기시 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약산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묻혀버린 인물이다. - 남한 입장 : 빨갱이 48년 북한을 방문했을때 김원봉은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월북을 한 인물이다. - 북한 입장 : 장제스의 스파이 김일성이 연안파(조선 의용대중 일부가 연안으로 이탈하여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았을 때의 주요인물들)와 김원봉을 숙청할때 그들이 이전에 장제스와 손을 잡았던 이력을 내세운다. ★ 그렇지 않다 김원봉은 어떤 이념도 상관치 않고 독립에 도움 된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 장제스의 황포 군관 학교 시절, 중국의 국공 합작이 이념적 모순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념은 공동의 목표인 항일 투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았다. - 그는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 25년 2월 22일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합치자" 는 주장을 했다. - 김규식은 조봉암이 한때 공산당 이었다는 이유로 안만나줄 정도의 강렬 민족주의자 였으나, 김원봉과는 함께 활동을 했다. - 해방 직전, 임시정부로 들어가 김구 다음 넘버2의 위치였다. - 독립 운동가 김성순 "약산은 기본적으로 애국자고 민족주의자이지 공산주의가 좋아 출발한 사람이 아니었다. 레닌주의 정치 학교도 꼭 공산주의 간부 양성이 아닌 항일 청년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 45년 재혼 때 주례가 김구 였다. - 좌파 계열 정당의 연합인 민족주의 민족전선(민전) 활동에서도 김원봉은 좌우 합장을 주장했다. - 마지막 조선의용대 분대장인 김학철 "주위에서 장제스를 암살하는데 김원봉에게 협조를 요청한 적이 있는데, 이에 약산은 "장개석이를 헤치우는게 우리의 급선무가 아니다. 지금 그 자의 속셈은 우리를 이용해보자는거요. 그렇다면 우리도 그자와 장기를 둬서 안될게 뭐가 있소? 우린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유리한거라면 어떤거라도 이용해야지 않겠소?" 라고 전했다. ★ 왜 월북을 했나 독립 운동의 영웅이었지만, 이승만이 대대적인 국민적 환영을 받으며 입국을 했던것에 비해,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은 채 초라하게 입국을 한다. 이후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이유로 빨갱이 낙인의 공격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47년 3월 민전 산하 단체의 파업 중, 장택상의 사주를 받은 악질 고등계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화장실에서 바지도 제대로 못입은채 연행 된 뒤, "의열단 단장 했다고 설치는데 빨갱이짓하면 다 소용없다"는 공개 모욕에 고문을 당하게 된다. 풀려난 뒤 그는 "여기서는 왜놈 등살에 언제 죽을지 몰라. 중국에서 일본과 싸울때도 한번도 이런걸 당한적이 없느데, 내가 악질 친일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라고 원통해하며 3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4개월 후 47년 7월, 좌우 합작을 함께 모색하던 여운형이 암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그것을 구실로 민족 지도자를 살해하는 일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것이다" 라고 분개하며 본인의 신변에도 불안함을 느낀다. 결국 다음 해 48년 4월, 김구 김규식과 더불어 남북 제정당 연석회의 참석을 이유로 평양으로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남한에서 좌파로는 정치 지도자로 살아남을수 없었고, 지속적인 백색테러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당시 북한에서 요직을 차지하던 이들이 과거 그의 동지인 연안파 였으며, 무엇보다 독립군 활동 수십년간 한번을 잡히지 않았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노덕술에게 당한 수치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이다. 51년 전쟁 중 김원봉의 이복동생들은 남한에서 보도 연맹원으로 몰려 총살을 당했으며, 전쟁 후 김일성은 58년 그에게 노동 훈장을 수여하였지만, 체제 선전 도구로만 이용을 하다가 같은 해 연안파 숙청 때 수감을 하였고, 결국 김원봉은 감옥에서 청산가리로 자결을 한다. 약산 김원봉은 여전히 남한에서 독립 훈장 하나 받지 못했으며 북한에서 애국열사능, 혁명열사능에 안치 되지 못하고 있다 팟 캐스터 이이제이 방송한 내용 요약정리한게 이 분 블로거에 있어서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영화속에서 마냥 사진 찍는걸 참 좋아했다지요!! 언제 죽을지 몰라 뭐라도 남겨야 할것 같은데 사진 만한게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의 이념은 제쳐두고서라도,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 걸고 항일독립투쟁 일선에 서신 분이고, 그 사실 또한 역사가 증명해 주기에 우리가 등한시 할 인물은 절대 아닐겁니다.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노덕술 같은 인간의 삶을 비교해 보면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수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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