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아 아봇 프로브스가 예루살렘에 병에 걸렸거나
몸을 다친 성지 순례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을 세웠다.
병원조직은 1005년 칼리프 알 하킴에 의해 병원과 부속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1023년 이탈리아 아말피와 살레르노 출신의 상인들이 이집트 칼리프의 허가를 얻어 병원을 다시 세웠는데
그 병원은 세례자 요한 묘지에 세워졌고 베네딕토회 수사들의 봉사로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하였다.
1309년 터키 남쪽의 로도스 섬을 정복하고, 그곳에 기사단의 근거지를 삼고 병원을 세우고 활동하면서
동지중해의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었다.
터키의 무슬림군은 동쪽의 유럽을 정복해 나가기를 원했는데, 그 길목에 위치해 있는 것이 바로 로도스 섬이었다.
1522년 6월 말, 오스만 투르크의 300여척의 대함대가 로도스 섬 해안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1만의 군대가 선발대로 로도스에 상륙하는 한편, 그 후속 부대도 진군을 준비합니다.
투르크 군대는 1만 5천여 예니체리가 포함된 10만여 대군. 이에 맞서는 성 요한 구호기사단의 단장 아이슬-아담에게는
600명이 채 안되는 기사와 약 1천 5백의 용병들, 그리고 3천 정도의 민병대 전함은 7척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성 요한 기사단에는 당대 최고의 포수가 있었고 그가 보수한 견고한 성채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기사들 개개인이 전투의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슐레이만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구호기사단에게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지금 당장 항복하면 크레타나 그 외 어디든지 가지고 있는 모든보물과 유물을 가지고 갈 수 있게 해 주겠다.
하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성 요한 기사단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이 돌아갑니다.
그리고 8월 1일. 전투가 시작되던 날 오스만 투르크 측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됩니다.
성 요한 기사단은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갑옷을 입고 도합 600여명의 기사들이 성벽위에
나란히 서서 미동도 않고 이를 지켜봅니다.
첫 날의 전투는 서로간에 별다른 피해 없이 그저 시위효과만을 남기고 끝납니다.
그 후 약 3개월 간의 공성전이 벌어집니다. 10:1을 훨씬 넘는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구호기사단은 무척 잘 버팁니다.
반대로, 10만 대군을 운용하는 투르크 측도 300여척의 함대를 동원해 이 10만명에 대해 원활한 보급을 하는 한 편,
성 요한 기사단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끊으려 합니다.
일상적인 전투에 변화가 온 것은 9월 초. 투르크 군이 땅굴을 파고 성벽 아래에서 폭약을 폭파시켜, 성벽의 일부가 무너집니다.
폭 2미터 정도였다고 하는 이 돌입로를 향해 돌격 명령이 떨어집니다.
무스타파 파샤 휘하의 2만여 군대가 전원 투입되는 대규모 전투. 이에 맞서는 성 요한 기사단은 1/10도 안되는 소규모였지만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진짜 기사들과 그 부하들입니다.
전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투르크 군은 2천여 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납니다.
구호기사단은 기사 십여명과 소수의 병사를 잃습니다.
이후 다시 지루한 전투가 계속됩니다.
슐레이만은 진전없는 전황에 짜증내고 초조해하지만 성과는 없습니다.
결국 그는 9월 24일, 전면공격을 개시합니다. 투르크 전 군이 동시에 성채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기사단 측도 사력을 다해 이를 막아냅니다.
특히 수비가 약한 듯하던 에스파냐 성채 쪽에 공격이 집중됩니다.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하에 1만 5천의 예니체리와 1만의 투르크 군이 이 곳에 투입됩니다.
전투는 여섯시간이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이 날 투르크 군은 1만 5천이 희생되었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 역시 기사 200여명을 포함해 4천여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아무 성과없는 전쟁은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투르크 군은 이때까지 6만이 넘는 사망자를 냈고 부상자는 그보다 많았습니다.
하지만, 술탄 슐레이만 2세는 로도스를 반드시 점령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투르크 군 내부에서도 불만이 높아집니다.
12월 1일, 슐레이만은 기사들이 항복한다면 개전초기 자신이 제시했던 것들을 그대로 들어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12월 21일... 기사단장 아이슬-아담은 슐레이만에게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달합니다.
이미 성 안에는 기사 180여명, 병사 1천 5백여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은 모물과 무기, 군기, 기사들의 짐 등을 모두 배에 싵습니다.
약 5천여명의 주민들이 기사단과 함께 갈 것을 원합니다.
이들은 1월 1일 로도스 섬을 떠납니다.
그리고... 고난이 가득한 시간들을 거쳐 로도스 섬에서 쫓겨난 지 8년 뒤인 1530년 몰타 섬을 얻게 됩니다.
로도스 섬에서 쫓겨난 뒤 수년 동안 성 요한 기사단은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였습니다.
여러 나라의 왕실을 떠돌며 도움을 요청한 끝에 카를 5세가 그 자신에겐 쓸모없다고 생각했던지
시칠리아와 튀니스 사이에 있는 몰타라는 바위투성이 섬을 줍니다.
기후는 척박하고 바위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섬이었지만
기사들은 이곳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리고 수십년에 걸쳐 이곳을 요새화 시키기 시작합니다.
이와 함께, 주변을 지나가는 투르크 선박들을 공격하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성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557년... 로도스 공성전 당시 28세의 젋은 기사였던 쟝 파리소 드 라 발렛이 기사단장의 직위에 오릅니다.
15265년, 이제 로도스 공성전 때의 젊은 나이가 아니라 나이먹은 술탄 슐레이만 2세는 오래전 자신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그리스도의 독뱀'들이 다시 둥지를 트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피알리 파샤와 무스타파 파샤에게 7천여 예니체리, 6천여 시파히(중장기병)을 포함한 3만의 군대를 주어
몰타를 공격하게 합니다.
이에 대항하는 성 요한 기사단은 약 7백여 기사와 1천 3백여 병사들,그리고 4천여 선원과 민병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도스 섬 때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투르크 함대가 몰타 섬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포위공격이 시작되던 시기에 투르크 함대 제독인 토르구트가 살해당합니다.
제독이 죽고 해상지배권이 약해졌지만 투르크 군은 용감히 싸워 성 엘모 요새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섬의 돌출부마다 하나씩 세워진 요새 중 하나를 탈환하는데 지불한 댓가는 4천여 병사의 목숨....
성 엘모 요새의 점령 이후로 73일간 투르크 군은 계속 공격하지만 뚜렷한 성과없이 시간만 지나갑니다.
무스타파 파샤는 계속적으로 로도스 때보다도 더 유리한 항복 조건을 제시하지만 기사단장 라 발렛은 이를 끝까지 무시합니다.
아마도 이 나이든 기사단장의 마음 속에는 28살에 맛보았던 쓰디쓴 패배에 대한 복수욕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성 요한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성난 사자처럼 싸웠습니다.
73일의 전투 끝에 또 다른 요새 중 하나인 성 미첼의 요새의 벽에 돌파구를 뚫는데 성공하지만,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들은 로도스에서 보여주었던 강력한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돌격해오는 투르크 군을 백병전으로 제압합니다.
이렇게 전투가 진전없이 계속되는 동안 에스파냐(스페인)에서의 지원군이 몰타 섬에 도착합니다.
병력수는 약 8천여....
투르크 군은 당혹스러워 합니다.
네 달이나 전투를 벌여왔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습니다. 거기다 군대의 손실이 커서 사기가 엉망이었습니다.
여기다가 현재 수비군의 현재 수비군의 배나 되는 병력이 지원을 오자, 투르크 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투르크 군은 병력의 2/3를 잃은 상태로 후퇴하게 됩니다.
기사단장 라 발렛은 그 후로 3년을 더 살았습니다. 살아있는 동안도 꾸준히 성벽과 요새를 복구/보강하여
투르크 군이 다시 오더라도 물리칠 수 있도록 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합니다.
지금도 몰타 섬에는 그가 남긴 요새는 공화국의 수도로 '발레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몰타기사단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 (붉은색) .. 기타관계를(외교적 관계 x) 맺고 있는 나라 (주황색)..
이후,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하게 됩니다. 거주할곳이 없어 성요한기사단은 이곳저곳 떠돌게 되고 (당시, 러시아제국의 지원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834년 로마에 정착.. 이때부터는 군사적인 측면은 거의 사라지고 인도주의적·종교적 조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몰타기사단 국기입니다..
1986년 몰타공화국이 주권을 인정하면서 영토의 일부를 넘겨주겠다고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교 사절, 자국 등록 선박, 자체 자동차 번호판 등을 갖고 있고, 우편 협정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나라들에서만 통용되는 우표도 발행함으로써
영토 없는 국가로 불리기도 한다.
성요한기사단(=몰타 기사단) 과 몰타공화국은 다른 나라입니다..
추가로 재밌던 봤던 영화 킹덤오브헤븐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픽션을 가미해서 만든 수작입니다..
살라딘과 기사단과의 전쟁도 눈여겨 볼만한 장관입니다..
(보실려면 꼭 감독판으로 보세요)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이면서 이슬람교도측의 영웅이 된 살라딘
르네상스 시대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가 언급한 '성공한 지도자에게 필요한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이다.
- 역량(virtu), 행운(fortuna),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질(necessita)
6/26~7/4 단 9일만에 자신의 원하는 장소에서 그리스도교도와 '하틴전투'의 결전을 벌임으로써,정황을 단숨에 바꾸어 버리게 된다.
성 요한 기사단은 귀족 출신으로 의료가 주축이며, 그리스도교도 순례자를 보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병원 기사단'이라고도 불리고, 향후 본거지를 이동함에 따라 '로도스 기사단','몰타 기사단'으로 이름이 바뀐다.)
'병원 기사단'의 '크락 데 슈발리에' 내부 회랑 아치 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
"Sit tibi copia, Sit sapientia, Formaque detur, Inquinat omnia sola, Superbia si comitetur."
"네가 유복한 출신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네가 지력을 갖고 태어났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또한 네가 미모를 갖고 태어났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 중 하나라도 원인이 되어 네가 오만하고 건방져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오만과, 오만의 표현인 건방짐은 너 한 사람만이 아니라 네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을 해치고 더럽히며 비속화하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완결판이 나왔다는 소식에 언뜻 예전에 읽었던 전쟁 3부작이 생각나서 옮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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