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줏간에서 고기포장지로 발견된 ‘마태 수난곡’!
푸줏간 종이에서 발견한 그 곡을 초연 지휘함으로써
19~20세기 바흐 부흥운동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그
음악이 바로 음악의 아버지로 통칭되는 바흐의 걸작
‘마태 수난곡’이었다.
생전에 바흐는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살았고 그가 작곡한
곡들은 그리 좋은 평을 얻지 못했던 것이 사실인데, 슬하
에 자녀가 20명이나 됐기에 귀족가문 결혼식, 왕이나 대주
교의 대관식, 장례식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야 했다.
결국 그는 음악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발견한 이후 그의 음악은 극
적으로 부활하게 되어 당대에 쓰이던 모든 기교와 형식들
을 가지고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한 장본인으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사진 보시면 알겠지만 잘 생겼습니다..
게다가 요즘 흔히 말하는 엄친아입니다.
조부인 모제스 멘델스존이 당시 유럽의 유대인을
대표하는 미학자, 철학자, 번역가이자 유능한
사업가였고 꽤 규모가 큰 은행소유가이기도 했습니다.
문화계의 "로스차일드 가문"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지난 2009년 "BBC 뮤직매거진"는 음악사 최고의
천재 10인 명단에 1순위에 올려놓기도 했었습니다.
1858년 영국빅토리아공주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 연주로 사용되면서 오늘날
전세계 모든 이들의 축복음악으로 사용되는 "결혼행진곡" ..
멘델스존이 17살때 작곡한곡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 작곡가의 재능 뿐 아니라 교육자, 지휘자로서도 출중한 재능을 뽐냈고..
지휘자의 능력을 곡 해석의 능력까지로 확대시킨 사람이기도 하다더군요..
아무래도 멘델스존의 가장 큰 업적은 "마태 수난곡"을 부활시켜 연주한것이 가장 큰 공적일겁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순혈주의 때문에 바그너를 우상화시키고 대신 멘델스존을 격하시켜버려서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요!!
불행중 다행인것은(??) 멘델스존 사망이후에 그러한 행동이 벌어져서 자신이 직접 겪지 않았기에 조금은 다행이라고 할까요..
조금은 특이한게 친누나와 교류에요..
너무 친해서인지 동생 뺏어가는 결혼식에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ㅋㅋ
누나 파니 멘델스존 또한 뛰어난 작곡자이자 얘기가 통하는 진정한 벗이기도 했는데 누나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그
스트레스 때문이지 바로 생을 마감했다지요
세실 장르노(아내) 또한 한 미모하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젊디 젊은 38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는게 재능에 비해 너무 아쉬운 대목입니다..
왼쪽은 멘델스존 어릴적 모습..
오른쪽은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
참조: SCENE PLAYBILL 이영규..
공연보러갔다가 잡지가 있는데 무료임에도 불구하고 일만원이상하는 왠간한 잡지보다 내용이 알찹니다..
클래식 음악보다 이런 뒷이야기가 재밌어서 옮겨봤습니다..
(음악도 들어보니 좋습니다..ㅎㅎ)'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돈이 돈을 번다고? 당신 돈으로 그들이 돈을 버는 거야 (0) | 2013.04.16 |
---|---|
영화잡지)) KINO.. (0) | 2013.03.16 |
세계사)) 말라카해협.. (0) | 2013.02.08 |
나의 가난은.. (0) | 2013.01.31 |
홍대 카페.. (0) | 2013.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