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서 광복군으로 활동
정치권 러브콜 거절하고
평생을 중국연구 힘써
오명없는 지식인 표상
“나이 들수록 존경받던 분”
“우리 시대의 참스승을 잃었습니다.”
김영춘 민주당 최고위원은 7일 들려온 김준엽(91) 전 고려대 총장의 별세 소식에 황망해했다. 김 전 총장이 재직하던 시절인 1984년 그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다. 김 최고위원은 그해 9월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자마자 제적 위기에 처했다.
“1984년 이전에는 학교에 군사정부의 산물인 학도호국단이라는 조직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이를 없애면서 총학생회가 부활했는데 전두환 정권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회장으로 당선된 학생을 제적하라고 학교 쪽을 압박했지요. 그런데 김 총장께서 정권의 요구를 석달 동안 거부했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대표를 뽑겠다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는 게 이유였지요.”
김 최고위원은 그해 11월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농성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된 뒤 제적됐고, 김 전 총장도 결국 1985년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학교 재단에 의해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총장으로서 치른 마지막 공식행사였던 19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에서 김 전 총장이 남긴 말은 “사회의 부정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돼라”였다.
그 뒤 김 전 총장은 평생 ‘관직을 맡지 않겠다’는 소신을 지키며 야인으로 일관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8년 국무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고,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없다”며 고사했다. 그 전에도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김종필씨한테서 공화당 사무총장직을, 1974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통일원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한사코 물리쳤다.
학계 후배들에게도 김 전 총장은 여의기,에 너무나 애석한 원로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과)는 “연세가 높아질수록 더 존경받은 분”이라고 김 전 총장을 회상했다. “지식인 가운데 독재정권에 협력하거나 부정부패에 끼어 있거나 권력남용 등을 안 한 사람이 드문데, 그분은 예외적인 존재였지요.”
|
||||||
김 전 총장은 이렇듯 독재정권 시절 양심을 지킨 지식인이자 일제에 항거한 독립투사였다. 그는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돼 그해 2월 중국 쉬저우에 주둔한 쓰카다 부대로 끌려갔다.
한달 뒤 일본군을 탈출한 김 전 총장은 중국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시작한다. 그해 7월 역시 일본군을 탈출해 중국 유격대로 온 고 장준하 선생 등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6천리길을 걸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합류했다. 그 당시 경험한 일을 김 전 총장은 1985~2001년 16년 동안 5권으로 정리한 회고록 <장정>에, 장준하 선생은 회고록 <돌베개>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 두 회고록은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물로 평가된다. 김 전 총장은 1955~62년,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월간 <사상계> 편집위원·주간·부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벼슬’에 초연했던 김 전 총장은 1988년부터 현재까지 재단법인 사회과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연구를 지속했다. 그가 줄곧 관심을 가진 분야는 한-중 관계였다. 해방 뒤 중국에 남아 1946년부터 3년간 베이징대의 전신인 중국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그는, 1948년 제1회 졸업생 3명을 뽑아 한국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정부 수립 뒤인 1949년 귀국해서는 조교수를 시작으로 총장이 되기 전까지 33년간 고려대에서 중국 근대사를 가르쳤다.
1958년에 초판을 펴낸 <중국공산당사>(사상계)는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중국 연구서였다. 1957년 설립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부소장과 소장을 지냈다. 서양이나 일제가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바라보는 우리 나름의 견해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엔 중국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설치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중국 베이징대 등 8개 대학에 한국학연구소가 자리를 잡았다. 중국에 흩어진 우리의 옛 문화와 독립운동의 흔적을 복원하는 활동에도 주력했다. 김 전 총장은 상하이·충칭·항저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 윤봉길 의사기념비 확대 사업 등에도 참여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민족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숨 가빴던 한 세기를 살아낸 그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2005년 <고려대 교우회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전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이가 나를 고대 총장직에서 쫓아냈을 때도 나는 좌절하지 않았어요. 역사에 대한 신뢰, 정의와 선 그리고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걸 믿었던 거죠. 나 쫓겨나고 전두환 정권 1년 만에 망했어요.”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한겨레> 자료
2011년 6월자 신문입니다.
----------------------------------------------------------------
일이 늦게 끝나서 조금은 늦은 시간에 헬스장 런닝머신 위를 걸었습니다.
런닝머신 앞의 모니터를 켜니 김준엽 선생님의 묘가 보입니다.
(역사스페셜 마지막 부분 방송중이었습니다.)
오늘자 kbs1 역사스페셜에서 김준엽 선생님의 생애를 조명한 모양입니다.
남산에서 이승만씨의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있는 이때에 이분의 삶을 다시 되새겨 봤음 해서 올려봅니다.
(kbs vod는 무료로 재시청 가능하니깐 시간되시는 분들은 한번씩 보세요!!)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사)) 지식인 이념분포도.. 경향신문 (0) | 2011.08.26 |
---|---|
시사)) 민주화 20년,.. 지식인들.. (0) | 2011.08.26 |
인물)) 홍종우.. (0) | 2011.08.24 |
인물)) 장하석 교수.. (0) | 2011.08.23 |
귀천과 소풍길.. (0) | 2011.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