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5번.
고교 시절의 구로다는 주전으로조차 뛰지 못한 무명이었다.
2013년 그의 모교를 방문하여 당시 야구 고문교사를 만난 취재진은 ‘고교 시절 구로다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한 선수였다’는 당황스러운 반응과 맞닥뜨렸다.
잠시 침묵하던 교사는, ‘대학에 들어가 140km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그 구로다가 맞는지, 혹시 이름을 착각한 건 아닌지 의심했던 건 기억이 난다’고 덧붙여 취재진을 더욱 당혹케 했다.
구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5번.
고교 시절의 구로다는 주전으로조차 뛰지 못한 무명이었다.
2013년 그의 모교를 방문하여 당시 야구 고문교사를 만난 취재진은 ‘고교 시절 구로다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한 선수였다’는 당황스러운 반응과 맞닥뜨렸다.
잠시 침묵하던 교사는, ‘대학에 들어가 140km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그 구로다가 맞는지, 혹시 이름을 착각한 건 아닌지 의심했던 건 기억이 난다’고 덧붙여 취재진을 더욱 당혹케 했다.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4년도 조사에서 292만명의 팬으로(히로시마 인구는 119만명), 구단 인기 순위 3위.
2군 경기장 입장객도 2만명으로 일본 프로야구 최고 수준
스폰서는 지역기업 마쓰다 자동차(구 도요공업).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스폰서는 '히로시마 수산시장'.
1950년. 2차 대전의 원폭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한 시민구단으로 창단되다.
1951년, 다이요 훼일즈에의 합병이 논의되었다가 무산되다.
1952년, 승률 3할 이하의 팀을 타 구단에 합병시키기로 결정되다. 에이스 하세가와 료헤이의 분투에 힘입어 간신히 3할을 기록, 합병을 면하다.
1967년, 18년 연속 리그 하위권을 기록. NPB 역사상 두 번째 최장 기록.
1968년, 히로시마 시민들이 현내 대표 기업인 도요공업에 단체로 청원, 도요공업이 그를 받아들여 스폰서가 되나, 어디까지나 ‘팀을 유지시키는 수준의 지원’으로 선을 긋다.
1975년 – 1990년, 영광의 시절, 여섯 번의 리그 우승, 세 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
1991년 이후 2012년까지 우승 없음. 포스트 시즌 진출 없음. 15년 연속 리그 하위를 기록하다.
시민구단으로 만들어졌고, 여전히 시민구단과 다름없이 경영되어 왔다. 태생적인 자금난, 그로 인해 막을 수 없는 선수 유출로 FA 제도 활성화 이후 쭉 리그 하위를 전전해왔다.
히로시마 팬의 십계명은 승패에 연연하지 말 것. 남의 FA를 탐내지 말 것. 용병이 성적을 내도 좋아하지 말 것, 용병에게 정을 주지 말 것.
그 중 다섯 번째 계명, FA를 앞둔 선수는 과감히 버릴 것.
이 계명에 대해서는 이렇게 덧붙여져 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4년도 조사에서 292만명의 팬으로(히로시마 인구는 119만명), 구단 인기 순위 3위.
2군 경기장 입장객도 2만명으로 일본 프로야구 최고 수준
스폰서는 지역기업 마쓰다 자동차(구 도요공업).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스폰서는 '히로시마 수산시장'.
1950년. 2차 대전의 원폭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한 시민구단으로 창단되다.
1951년, 다이요 훼일즈에의 합병이 논의되었다가 무산되다.
1952년, 승률 3할 이하의 팀을 타 구단에 합병시키기로 결정되다. 에이스 하세가와 료헤이의 분투에 힘입어 간신히 3할을 기록, 합병을 면하다.
1967년, 18년 연속 리그 하위권을 기록. NPB 역사상 두 번째 최장 기록.
1968년, 히로시마 시민들이 현내 대표 기업인 도요공업에 단체로 청원, 도요공업이 그를 받아들여 스폰서가 되나, 어디까지나 ‘팀을 유지시키는 수준의 지원’으로 선을 긋다.
1975년 – 1990년, 영광의 시절, 여섯 번의 리그 우승, 세 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
1991년 이후 2012년까지 우승 없음. 포스트 시즌 진출 없음. 15년 연속 리그 하위를 기록하다.
시민구단으로 만들어졌고, 여전히 시민구단과 다름없이 경영되어 왔다. 태생적인 자금난, 그로 인해 막을 수 없는 선수 유출로 FA 제도 활성화 이후 쭉 리그 하위를 전전해왔다.
히로시마 팬의 십계명은 승패에 연연하지 말 것. 남의 FA를 탐내지 말 것. 용병이 성적을 내도 좋아하지 말 것, 용병에게 정을 주지 말 것.
그 중 다섯 번째 계명, FA를 앞둔 선수는 과감히 버릴 것.
이 계명에 대해서는 이렇게 덧붙여져 있다.
- FA 선수들도 사람이다. 승리 또는 돈, 둘 중에 하나는 갖고 싶어한다.
다만, 2006년, 아카헬(붉은 헬멧, 카프스의 애칭) 팬들, 그 십계에 단 한 번 정면으로 도전하다.
구로다 히로키의 FA였다.
다만, 2006년, 아카헬(붉은 헬멧, 카프스의 애칭) 팬들, 그 십계에 단 한 번 정면으로 도전하다.
구로다 히로키의 FA였다.
3.
2006년 10월.
구로다 히로키는 생애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2006년 시즌 도중 FA 권한을 얻었다.
이 무렵 히로시마는 영광의 시대를 끝내고 이미 십여년째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었다. 또한 한신 타이거즈 2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몇 년째 수많은 주축 스타플레이어들을 FA에서 놓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용병들조차 히로시마에서 활약한 뒤에는 다른 팀으로 빠져나갔다. 시민구단 경영 특유의 고질적인 재정난 탓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로시마가 구로다를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 행동했다.
2006시즌 구로다의 마지막 홈 등판에서 히로시마 팬들은 구로다의 등번호 15번이 새겨진 붉은 카드를 들고 그들의 작은 구장을 메웠다. 그 가운데 내건 대형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 함께 싸워 온 지금까지도, 앞으로 빛날 그 날까지도, 당신이 눈물을 흘린다면 (우리가) 당신의 눈물이 되어줄 것이다. 히로시마 카프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
지배적인 예상을 배반하고, 구로다 히로키는 FA서 히로시마에 잔류하여 1년을 더 뛰었다.
하지만 빅 리그 진출을 향한 그의 열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3세, 결코 빠르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나이에도 그는 메이저 진출을 결정했다.
“아직 내 안에 불꽃이 남아 있을 때 싸워보고 싶다.”
그러나 그는 또한 덧붙였다.
“아직 힘이 남아있다면 언젠가 나는 다시 일본에 돌아와 공을 던질 것이다. 그리고 그 팀은 히로시마다. 일본으로 돌아온다면 히로시마 밖에 없다.”
4.
MLB의 구로다는 기묘한 투수였다.
노모 히데오와 같은 센세이션을 일으킨 투수는 아니었다.
마쓰자카, 이가와, 훗날의 다르빗슈니 다나카처럼 일본과 미국 양쪽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MLB에 들어선 선수도 아니었다.
역대 MLB에 진출한 일본 투수들의 3년차 부진을 분석한 한 기사에서, 기자는 구로다에게만은 다만 짤막한 코멘트만을 남겼다.
구로다 히로키 (통산 bWAR 21.7 / fWAR 22.6)
2008(33세) 183.1이닝 09-10 3.73 (b 2.7 / f 3.3)
2009(34세) 117.1이닝 08-07 3.76 (b 0.6 / f 2.1)
2010(35세) 196.1이닝 11-13 3.39 (b 3.4 / f 4.1)
- 39세 시즌에도 199이닝을 던진 유일한 예외 사례.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mlb&ctg=news&mod=read&office_id=224&article_id=0000003353))
다저스와 양키스라는 빅리그 유수의 명문 구단에서 수려한 커리어를 쌓았음에도 그는 조용하고도 꾸준한 선수였고, 그 꾸준함을 위하여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각고의 노력을 반복한 선수였다.
썩 좋지 못한 승운에도 남의 탓을 한 적이 없었고, 다년 계약 대신 1년 계약을 선호했으며, 그 모든 것들을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런 구로다에 대한 동료들과 보드진의 평가는 높았다. 33세의 나이로 시작한 7년의 세월, 40세를 앞둔 노장이 되었음에도 그 높은 평가는 마찬가지였다.
2014년의 해가 넘어갈 즈음, 다저스와 샌디에고는 각각 1600만 달러+a와 1800만 달러를 그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그 모든 오퍼를 거절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도
구로다 히로키는 기묘한 투수였던 것이다.
5.
그래서 결국, 구로다 히로키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돌아왔다.
그토록 구로다를 사랑한 히로시마였지만 그들은 수십 년째 NPB 최악의 재정으로 널리 알려진 팀이었고, 그런 그들이 구로다에게 제안할 수 있었던 돈은 4억엔 정도였다. 한 때 20억엔대로 선수단 전체를 꾸렸던 히로시마로서는 그들의 전설을 위해 온 여력을 짜낸 돈이었지만, 그렇더라도 다저스와 샌디에고가 약속한 돈의 몇 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돈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구로다 히로키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돌아온 것이다.
2006년 10월.
구로다 히로키는 생애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2006년 시즌 도중 FA 권한을 얻었다.
이 무렵 히로시마는 영광의 시대를 끝내고 이미 십여년째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었다. 또한 한신 타이거즈 2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몇 년째 수많은 주축 스타플레이어들을 FA에서 놓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용병들조차 히로시마에서 활약한 뒤에는 다른 팀으로 빠져나갔다. 시민구단 경영 특유의 고질적인 재정난 탓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로시마가 구로다를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 행동했다.
2006시즌 구로다의 마지막 홈 등판에서 히로시마 팬들은 구로다의 등번호 15번이 새겨진 붉은 카드를 들고 그들의 작은 구장을 메웠다. 그 가운데 내건 대형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 함께 싸워 온 지금까지도, 앞으로 빛날 그 날까지도, 당신이 눈물을 흘린다면 (우리가) 당신의 눈물이 되어줄 것이다. 히로시마 카프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
지배적인 예상을 배반하고, 구로다 히로키는 FA서 히로시마에 잔류하여 1년을 더 뛰었다.
하지만 빅 리그 진출을 향한 그의 열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3세, 결코 빠르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나이에도 그는 메이저 진출을 결정했다.
“아직 내 안에 불꽃이 남아 있을 때 싸워보고 싶다.”
그러나 그는 또한 덧붙였다.
“아직 힘이 남아있다면 언젠가 나는 다시 일본에 돌아와 공을 던질 것이다. 그리고 그 팀은 히로시마다. 일본으로 돌아온다면 히로시마 밖에 없다.”
4.
MLB의 구로다는 기묘한 투수였다.
노모 히데오와 같은 센세이션을 일으킨 투수는 아니었다.
마쓰자카, 이가와, 훗날의 다르빗슈니 다나카처럼 일본과 미국 양쪽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MLB에 들어선 선수도 아니었다.
역대 MLB에 진출한 일본 투수들의 3년차 부진을 분석한 한 기사에서, 기자는 구로다에게만은 다만 짤막한 코멘트만을 남겼다.
구로다 히로키 (통산 bWAR 21.7 / fWAR 22.6)
2008(33세) 183.1이닝 09-10 3.73 (b 2.7 / f 3.3)
2009(34세) 117.1이닝 08-07 3.76 (b 0.6 / f 2.1)
2010(35세) 196.1이닝 11-13 3.39 (b 3.4 / f 4.1)
- 39세 시즌에도 199이닝을 던진 유일한 예외 사례.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mlb&ctg=news&mod=read&office_id=224&article_id=0000003353))
다저스와 양키스라는 빅리그 유수의 명문 구단에서 수려한 커리어를 쌓았음에도 그는 조용하고도 꾸준한 선수였고, 그 꾸준함을 위하여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각고의 노력을 반복한 선수였다.
썩 좋지 못한 승운에도 남의 탓을 한 적이 없었고, 다년 계약 대신 1년 계약을 선호했으며, 그 모든 것들을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런 구로다에 대한 동료들과 보드진의 평가는 높았다. 33세의 나이로 시작한 7년의 세월, 40세를 앞둔 노장이 되었음에도 그 높은 평가는 마찬가지였다.
2014년의 해가 넘어갈 즈음, 다저스와 샌디에고는 각각 1600만 달러+a와 1800만 달러를 그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그 모든 오퍼를 거절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도
구로다 히로키는 기묘한 투수였던 것이다.
5.
그래서 결국, 구로다 히로키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돌아왔다.
그토록 구로다를 사랑한 히로시마였지만 그들은 수십 년째 NPB 최악의 재정으로 널리 알려진 팀이었고, 그런 그들이 구로다에게 제안할 수 있었던 돈은 4억엔 정도였다. 한 때 20억엔대로 선수단 전체를 꾸렸던 히로시마로서는 그들의 전설을 위해 온 여력을 짜낸 돈이었지만, 그렇더라도 다저스와 샌디에고가 약속한 돈의 몇 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돈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구로다 히로키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할 때. 일본에서는 그가 얼마 못 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고, 그가 일본으로 떠날 채비를 할 때, 미국에서는 그가 정말 돌아갈 것이라 믿지 않았다.
결국 몇 년이 걸려도 그가 돌아올 것을 믿은 것은 구로다 자신과 히로시마 도요 카프 뿐이었다. 히로시마는 돌아올 구로다를 위하여 7년 동안 그의 15번을 비워놓고 있었다.
이제 그는 다시 15번을 달고 히로시마에서 뛸 것이다.
아마도 공을 던질 힘이 남아 있는 한 영원히.
MLB 7년간 212경기 79승 79패 방어율 3.45 1319이닝.
아시아인으로서는 노모 히데오와 박찬호만이 가진 5번의 10승 시즌 기록을 달성했고, 일곱 시즌 동안 단 한 번도 3점대 이상의 자책점을 기록하지 않았다.
히로시마에서 다저스로. 다저스에서 양키스로.
양키스에서 다시 히로시마로.
세계의 정상에서 위대한 7년을 보냈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히로시마의 에이스는 그렇게 돌아왔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5번.
구로다 히로키.
출처;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99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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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진 선수입니다.
돈이 없어 선수를 살수도 없고 있는 선수도 보낼수 밖에 없을 정도로 넉넉지 못한 팀 히로시마 카프..
마쓰쟈카, 다르빗슈처럼 화재성이 엄청 큰 선수는 아니었지만, 꾸준함을 보여준 선수였고..
그 돌아가는 모습에 박수를 쳐 줍니다..
메이저리그 2선발급 투수가 마지막 선수생활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옵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 200억의 제의를 뿌리치고
36억 받고 자신이 처음 뛰었던 팀으로 말입니다..
어떻게 저럴수 있을까 ?!
출처 : 텐인텐[10년 10억 만들기]
글쓴이 : 酒有所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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