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민주화 운동의 얼굴이고 궤적이었다. 5년6개월에 걸친 두 번의 투옥, 26번의 체포, 7번의 구류, 사선을 넘나들었던 고문…. 독재가 지배하는 어둠의 시대를 살면서 그는 희망을 얘기했다. 64년에 맺은 그의 생은 민주주의자, 평화의 기록이었다.
■ 강제징집된 12남매의 막내
김근태는 1947년 2월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12남매의 막내였다. 초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3차례 초등학교를 옮기다 양평 양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광신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부친은 김근태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교직을 강제로 그만두게 된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동대문시장에서 스타킹과 양말을 떼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김근태는 “그때의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http://img.khan.co.kr/news/2011/12/30/201112310130010502340030000.jpg)
김근태 민청련 의장(왼쪽)이 1988년 석방된 뒤 부인 인재근씨(오른쪽)와 함께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양심수 전원 석방과 수배해제 및 사면복권 쟁취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 수배생활의 벗이 된 인재근
![](http://img.khan.co.kr/news/2011/12/30/20111231.01200105000002.02M.jpg)
포승줄에 묶인 김근태 전민련 집행위원장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피신 상태에서도 1972년 2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변형윤 상대 학장의 ‘결단’으로 복교조치가 됐기 때문이다. 김근태의 꿈은 교수였다. 하지만 “유신은 투쟁 이외에 다른 대안의 선택을 내 양심에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근태는 도피 중이던 1977년 8월 당시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위장취업 중이던 이화여대 출신 인재근을 만나 결혼했다. 1977월 5월 김근태가 6세 연하인 인재근에게 서울 광나루의 선상 매운탕집에서 “나랑 결혼하자. 그렇지 않으면 어디든 도끼를 들고 쫓아가겠다”고 ‘협박성 구혼’을 했다. 인재근은 훗날 “(청혼에) 기분좋았다”고 했다. 인재근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지냈다. 말을 배우고 가장 많이 한 말이 “양심수 석방”이라고 하는 그는 김근태의 ‘민주화 동지’였다.
![](http://img.khan.co.kr/news/2011/12/30/20111231.01200105000002.03L.jpg)
2002년 1월 김근태 당시 민주당 고문(가운데)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는 “매 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김근태)이었다. 김근태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조직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을 맡았다. 최초의 독자적·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였다.
공안당국에 그는 눈엣가시였다.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됐다.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는 1987년 대통령선거를 경주교도소에서 맞이했다. 선거 결과가 궁금했다. 선거 당일 자정이 넘어가자 교도관에게 결과를 물었다. “몰라서 묻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패배였다.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근태는 ‘분열’에 따른 패배에 절망했다. 1988년 6월30일 야당이 앞선 총선에서 승리하자 정부의 유화적 제스처에 따라 2년10개월 만에 석방됐다.
김근태는 1987년 대선 전후로 분열된 재야를 다시 결집하기 위해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노태우 정권은 3당 통합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자 1990년 5월 전민련 결성선언문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1992년 8월까지 옥살이를 시켰다.
■ 시작도 끝도 비주류였던 정치
![](http://img.khan.co.kr/news/2011/12/30/34oi5o346.jpg)
그는 2002년 16대 대선에 도전했다. 노무현 후보와 ‘개혁후보 단일화’를 조율했지만 실패했다. 경선에 나섰지만 대세를 잡지 못하고 그해 3월 후보를 중도 사퇴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당시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에게 2000만원을 받았으며 2억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했다. ‘원칙주의자 김근태’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http://img.khan.co.kr/news/2011/12/30/20111231.01200105000002.04L.jpg)
2008년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 진중권 당시 중앙대 겸임교수(왼쪽)가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을 인터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집권 후 노 대통령과는 자주 충돌했다. 2004년 6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총선 공약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개인성명을 내 “공공주택 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당 복귀 후에는 2006년 6월부터 8개월간 침몰하던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았다.
■ 평생을 괴롭힌 고문 후유증
김근태는 17대 대선에 다시 도전했지만 2007년 6월 도중에 사퇴했다. 건강도 포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의 몸은 온전치 않았다. 어눌한 말투, 불편한 거동, 굽은 어깨 등 고문 후유증을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훈장’이라고 했다. 그는 고문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 2001년 대선 경선을 준비하는 그에게 측근들은 고음으로 연설할 때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며 코 수술을 하라고 했다. 수술대에 누운 김근태의 눈에서는 의사가 마취를 시작할 때 눈물이 흘렀다. 김근태는 수술 후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치과의 시술용 의자가 전기고문을 받던 의자로 연상돼 치과에 가기를 꺼린다. 특정 비누도 쓰지 않는다. 물고문을 당할 때 그 비누 냄새가 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물고문 후유증으로 만성 비염을 달고 살아 늘 손수건을 들고 다녔다.
2007년 12월에는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다. 의학적으로 고문과 파킨슨병의 인과관계가 밝혀진 것은 없다고는 하나 고문이 원인일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파킨슨병은 약물로 완치되지 않는다.
![](http://img.khan.co.kr/news/2011/12/30/20111231.01200105000002.06M.jpg)
김근태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패했다. 김근태조차 ‘반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을 피할 순 없었다. 특히 신 후보가 뉴라이트 출신이었다. 김근태는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마지막 화두는 야권통합이었다. 김근태는 정권교체를 위한 야권대통합을 주창했다. 지난 3월 민주당 내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았다. 진보정당 인사들과도 접촉하며 대통합을 역설했다.
김근태는 ‘희망’을 얘기했다. <희망의 근거> <희망은 힘이 세다> 등 책에도 ‘희망’이 들어간다. 김근태에게는 “(1980년대) 죽음으로 내몰렸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할 수 없었던” 꿈이 있었다. 블로그에 적은 세 가지는 ‘정직한 나라(한국)’ ‘평화와 공존의 시금석(한반도시대)’ ‘협력과 발전의 새로운 공동체(동아시아연합)’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항상 평화로운 사람, 정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욕심 같은 바람은 ‘생각의 사람’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입니다.”
----------------------------------------------------------------------------------------
경향신문 오늘자 안홍옥기자..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건 두개가 있습니다..
대연정이라는 이름 아래 박근혜대표에게 내각의 절반을 야당에게 주는 대신 선거구제 개편을 시도하려고 했던 사건과
토지공개념 이라는 이름 아래 노무현대통령이 후보시절 공언했던 아파트 원가공개..
이 두가지 사건으로 노무현정부는 많은 지지자들 잃었습니다..
특히, 두번째 사건은 보수언론에서 원색적인 표현까지 써가면서 막 짖어댔던 기억이 납니다.
원리원칙주의자라서(?) 그런지 오히려 딱딱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고문은 예술이다라고 지랄발광하는 이근안씨는 목사짓 하면서 은혜로운(????)말씀을 신도들한테 전합니다..
담당검사였던 정형근씨는 공단이사장합니다..
그 당시 전기고문당하면서 들었던 라디오 아나운서의 서울올림픽을 맞아 서울의 봄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다고 합니다.
(예전 유명했던 모 가수는 요즘에도 군부정권에 들러리 선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그걸 얘기하더군요!)
2011년 씁쓸한 한해가 지나가네요.
힘든 삶을 살아오신 김근태님 그쪽에서는 이쪽보다 더 행복하게 사셔야 합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추천)) 한국의 미, 미술관 옆 인문학 (0) | 2012.01.13 |
---|---|
인물)) 변호사 조영래.. (0) | 2012.01.03 |
(펌) 예쁜 아가들 사진.. (0) | 2011.12.14 |
그림)) 이미경 펜그림.. (0) | 2011.12.08 |
김홍도의 군선도 (0) | 2011.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