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백제금동대향로

酒有所 2017. 4. 27. 17:33

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6/02/17/76490275.1.jpg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금동향로가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채로 있었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도 발굴되었는데, 백제금동대향로를 감싼 천이 세월이 지나 삭은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0Y8jbOq.jpg

디지털 복원도


그림 출처; 나무위키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1.8 cm이며 크게는 네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있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이다. 

74개의 봉우리에 12명의 인물과 42마리의 동물, 5명의 악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향로가 60cm 넘는건 드물다고 합니다.

보통 20~30cm 내외이거나 좀 작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숭이, 코끼리등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도 조각되어 있고,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도 있지만 봉황,신선이 조각되어 있고 전체적인 향로 분위기가

불교 보다는 중국 도교 영향을 많이 받았던걸로 나옵니다.



처음 발굴될 당시 얘기하는것 들어 보면 극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겁니다.


발견된 장소가 예전 백제 절터로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나성 사이의 작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절터가 원래는 계단식 논이었는데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절터 부근에 주차장을 마련하려고 공사를 시작합니다.


근처 땅 훑어 보니 자잘한게 나옵니다. 

금속유물, 쇳조각,재 등등..



저런 유물 나오니 발굴단의 입장에서는 금속제품 만드는 공방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주차장 공사는 지체되고 공사 중단 시킬 근거가 없는 상태인데, 

발굴단 윤무병(충남대 박물관장)선생은 이상하다면서 한번만 파보자고 사정해서 발굴비 2천만원을 

문화재청 노태섭과장 한테 부탁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2천만원 배정받아 발굴 작업 시작하는데

그쪽 지형이 계곡부인데다가 습기와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작업이 여간 힘든게 아닙니다.


12월 한겨울에 추위도 물론이거니와 그쪽으로 흘러들어가는 물 때문에 임시수로 만들고 작업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물구덩이로 된 바닥은 작업이 쉽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작업하던 김종만(부여박물관 학예사)씨의 말로는 작업하던곳에 보니

어렴풋이 뚜껑 같은 것이 보이는데 처음에는 돌조각상 그런걸로 보였다고 합니다.


꽃삽으로 조심스레 노출시켜 나가는데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다 싶었답니다.



학예실장과 관장한테 말하니 신관섭 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인부들이 본 상황이기 때문에 입소문이 나서 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고 최악의 경우

도굴이 발생할수도 있으니 야간작업을 시행하기로 합니다.


인부들을 귀가조치시키고 학예직들만 모여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살을 에는 그 추위에 손바닥으로 물구덩이의 흙을 4시간에 걸쳐서 조심스레 파냈습니다.



뚜껑과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고 진흙에 묻혀 있었기에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다들 귀한 유물이라고는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온전하게 발굴해 들어내 놓고도 사실 감상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뭔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자부심보다도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뒤에 가서야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였던 곳이었고, 

향로는 칠기에 넣어서 묻었던 것임을 알게 됐어요.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실이지요”



장장

1300 년 만에 햇빛을 본 유물입니다.


기사부분발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310131538011&code=900102



카더라소식통에 의하면

백제 말기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저 절의 승려들은 물론이거니와 유물 또한 온전치 못했을겁니다.

그곳을 지키는 한 승려가 자신은 죽더라도 저 유물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급하게 숨길려고 하다가 

저 곳에 놔둔게(던진게) 아니겠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기에 급박하게 숨기다 보니 불가피하게 저쪽에 놔둘 수 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진흙과 물이 진공상태 형태로 되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숨긴 승려는 아무래도 끝내 발설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지 않나 싶습니다.

발설하거나 살아있다면 그 귀한 유물을 그런 구덩이에 놔두지는 않았을거라 봅니다.



93년 발굴될때까지 무려 저곳에서 1300년 동안 진흙속에서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천년동안 햇빛을 볼 수 없을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겁니다.


아니, 영원히 묻혔을지도 모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건 모조품이고 진품은 부여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나는 "남부여의 공주다" 라는 유행어를 히트쳤던 천년지애에서 성유리씨가 

저 금동향로를 보고 저게 백제를 상징한다니 하면서 씁쓸해 했던 장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저 금동향로가 굉장히 정교하게 만든 당대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극찬합니다.

그 당시에도 일반인들은 사용하지 못하고 왕과 왕족만이 제사에 사용했던 유물이라고 ..

(드라마 극본을 쓴 사람이 잘 몰랐던 모양입니다)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사이에 13필지의 논이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유지인데 관광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주차장과 전시관을 만들려고 사들였던 땅에서 발견되었는데

만약 그때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아스팔트 깔린 주차장 밑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계속 잠들어 있을겁니다!!